“저희는 박창현 이진오 임태병 입니다. SAAI의 공동대표이자 사무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 상주하는 붙박이 스텝입니다. 또 작업하면서 서로 간에 교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집단입니다. 저희는 지휘자가 아니라 같이 연주하는 그룹, 잼 하거나 재즈 하는 사람들이며, 저희 셋만이 아니라 계속 저희와 작업하게 될 친구들과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맞춰가는 그런 성격의 사무실을 지향합니다.”
건축집단 SAAI는 자신들의 소개에 건축관이나 작품세계 보다 건축하는 과정과 방법을 얘기한다. 건축가로서 참 알듯 말듯하다. 그런 그들을 만난 건 <디자인로드-홍대前 S A A I between • interval • relations>에서다. <디자인로드-홍대前 >은 홍대 앞 디자인을 조명하는 기획전시로 더 갤러리와 스토리텔링 컴퍼니 봄바람이 기획하였다. 홍대 앞을 베이스로 작품 활동을 벌이는 디자인 회사 11개가 자신들의 작품을 릴레이 전시하는데 그 여섯 번째가 젊은 건축집단 SAAI의 전시다.
SAAI의 전시는 박창현 이진오 임태병 개별로 진행된 홍대 앞 읽기와 공동의 건축작업으로 구성되었다. 홍대 앞 읽기는 다소 표피적인 수준에 머무르나 홍대 앞이라는 공간을 사회, 문화, 역사적인 문맥 아래 읽으려 한다. 먼저 홍대 앞의 모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찾는데, 서교동 사거리의 모습이 담긴 사진가 이형록의 사진(빠지지마, 1956년) 한 장과 서교택지조성사업이 시작되던 당시의 지적도는 홍대 앞의 지형이 1950년대에 형성되었음을 말해준다. 개발 바람이 불던 1970, 80년대의 지도를 통해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변화 과정을 보게 된다(홍대 앞이 홍대앞이 아니었을 때). 그리고 현재 홍대 앞 지도 위에 표식된 카페 작업은 카페라는 공간이 어느덧 문화적 유희가 되는 트렌드를 말해 주기도 하며(WORKS in 홍대煎), ‘홍대 앞’의 공간 이미지는 개인의 기억이 스며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조각 내어 다시 퍼즐 맞추기를 하면서 재구성되기도 하고(無感覺 홍대), 다시 카메라 뷰파인더에 담긴 이미지를 줌인 줌아웃하여 낯설어 보이게도 한다(전체와 부분). 그래서 친근하고 일상적이던 홍대 앞의 건물과 장소는 줌잉으로 새로운 홍대 앞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다.
갤러리 지하층에 분리 전시된 SAAI의 공동작업은 많은 건축가들처럼 전시를 통해 작품 세계를 피력하거나 건축가의 자아와 대면하기를 의도하는 전시라기보다 마치 홍대 앞에 자신들을 인사시키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그들을 전시 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집담회를 통해 알고 보니, 동네건축가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집담회는 서로 전문적인 고견이나 주장을 어필하기보다는, SAAI와 이야기 손님 각자의 얘기가 자신의 스타일로 오고 간 일상적인 생활 이벤트에 가깝다. 물론 전시의 내용과 준비 과정을 짐작해 보면 결코 가볍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았겠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동네건축가가 되겠다며 그들의 동료, 지인 그리고 주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매니페스토와도 같다.
그런데 그들은 왜 동네건축가일까. 한 마디로 답한다, ‘동네는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지역이다’라고. 이 같은 간명한 답은 그간 진행해 온 지하층의 공동작업을 들여다 보고서야 그럴 듯해 보인다. 전시된 공동작업들은 매혹적인 조형성을 강조하거나 현란한 분석 툴을 이용한다거나 하는 합리적인 설계 방법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대지의 흐름에 벗어나지 않고 대지 조직에 순응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는 작업 경향, 그리고 작업들 대부분이 한적한 전원에 있었기에, 복잡하고 까다로운 도시에서 하면 ‘어떨까’ 하는 건축가로서의 욕망이 더해져 동네건축가가 되고픈 이유를 납득시킨다. 그리고 강남보다는 강북에서, 더군다나 건축가 스스로가 살고 있기 때문에 정보가 체화되어 있는 홍대 앞에서 하면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기회인데, SAAI도 최근 동네건축가로서 데뷔할 기회가 있었지만 진입장벽이 만만치 않았으니, 그 장벽이 결국은 땅이었다. 보통은 문화적 트렌드에 민감하고 먼저 반응하는 곳이 홍대 앞인 까닭에 개성 있는 건축어휘로 동네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킨다는 명분을 얻을 수도 있는 곳이 홍대 앞일 것이다. 그래서 새로움에 대한 욕구가 많으리라 예상되는 것도 홍대 앞이다. 하지만 의외로 건축가들에게는 척박하고 까다로운 곳이 홍대 앞이다. 그 속에서 홍대 앞을 잘 안다는 것만으로 동네건축가를 할 수 있을까.
SAAI가 흥미를 두는 것은 문화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된 홍대 앞의 이미지 연결과 지역 내 프로그램을 네트워킹 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열리는 건축의 가능성이다. 동시에 거대한 매스와 자기완결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그래서 홍대 앞의 건축적 접근 또한 달라야 하며, 형태보다는 내용을, 완결보다는 미완의 열려 있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동네건축가가 되고픈 이들의 생각이다. 기존의 공동작업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고 비춰지는 자신감의 이유이다.
돌이켜 보면, 홍대 앞의 동네건축가는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김기석 씨의 우리마당 연작시리즈에서 그 맥을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마당 연작은 평범한 슬래브 집을 조금씩 부수고 이으면서,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자연발생적으로 형태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마당, 씨어텔서울, 누나네가 되었다. 결과로 홍대 정문 앞 가로변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안마당으로 이어지는 도시의 공간은 도시가로의 활력과 선배 동네건축가로서 후배 동네건축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연작은 시간이 흘러 모습을 달리하고 변하고 있으니 이 또한 후배 동네건축가의 몫으로 남겨진 게 아닐까 한다.
현재 한국에서 3,40대 독립건축가가 자리잡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은 많다. 개성있는 건축언어나 든든한 스텝, 프로젝트를 위한 인적/물적 네트워크도 구성해야 한다. 경제적인 생존이 아니면 문화적으로라도 잔류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대규모 사무소에 몸 담은 이는 그 나름대로의 생존과 경쟁의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SAAI라는 건축집단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고 그들 역시 앞으로의 항해에 좌표를 두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들이 현실에 대처하는 자세는 다소 순리적이고 타협적이다. 디자인 시스템을 꾸리고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것에서 스스로를 스텝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때문에 무한경쟁의 틈새를 메우려는 그들의 존재감이 커 보인다. 이것이 부침하는 한국건축에 지역성을 근거로 한 저항을 기대하는 이유이고 그들이 별일 없이 살기 바라는 것이다.
그런 바램을 안고 두 차례에 집담회에 걸친 그들의 매니페스토 속으로 들어가보자.
집담회 #1
임태병 지하층 전시(공동작업)와는 달리 홍대 앞을 무대로 한 2층 전시는 서로 크로스체크 하면서, 조절해야 하는 게 저희 작업의 기조였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판을 벌려놓은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건축은 어떻게 해도 무겁구나 싶죠. 어마어마한 작업량과 막대한 인원과 시간 투입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홍대 앞에 흘러 들어온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애정을 가지고 여러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처음에 붙들어주고 원동력이 돼주셨던 분이 조윤석 씨라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오랫동안 지켜보신 분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조윤석 우리는 역사 이야기를 하면, 항상 ‘누구 이전’과 ‘누구 이후’로 구분을 짓는데요. 홍대 앞을 ’아지오Agio 이전’과 ‘아지오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카페 B-hind 이전과 이후로 나누죠 처음에 B-hind가 생겼을 때 대명의 빛이 밝아 오는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약간은 진부한 B-hind 이전의 숍에 비해서는 세련됨이랄까, 그 때문에 제가 많이 열광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가운데 카페에 큰 테이블을 놓는 경우가 없었죠? 아니, 1980-90년대까지는 ‘하이델베르그’나 ‘캔맥주’집 같은 곳에 큰 테이블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6-8명 정도가 둘러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스케일을 제시한 데는 B-hind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따로 또 같이’가 되었죠. 혼자 와서, 옆에 누가 앉아 있어도 자연스럽게 앉아있을 수 있었고요.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와 테이블에서 스터디도 하고 회의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이후에 홍대 앞의 카페는 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을 놓는 게 약속과도 같이 되었어요
배윤호 저는 사무실이 없었을 때인데, (B-hind의) 그 큰 테이블에서 일을 많이 봤어요. 큰 테이블에서 미팅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여 럿이 책을 놓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규모의 테이블 하나가 작은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모델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카페가 정치적이거나 카페테리아 문화가 살롱 문화처럼 인터렉티브하게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런 싹이 없어요. 제 친구들만 해도 문화기획을 하면서 이곳을 드나드는데, 생명이 금방 짧아지면서 곧바로 클럽문화나 인디로 빨리 넘어간 것 같아요. 출판기획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카페 문화가 제대로 성장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금방 조로하고 스타일이 오래 가지 못했어요. (디자인 스타일도) 카피들이 많은 것 같아 개인적으론 아쉽죠.
임태병 다들 아시다시피, B-hind 이전에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여럿 있었는데, B-hind를 그 정도로 평가해 주시는 건 약간 낯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홍대에 카페라든가, 음식점이라는 게 상업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한 쪽으로 쏠리지 않게 균형을 잡아 준 김명한 사장님의 공도 무시 할 수 없는 거죠. 사실 ‘aA디자인뮤지엄’에 가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단순히 스타일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뭔가를 얻고 그게 좋아서 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희는 거기 갈 때, ‘이런 의자는 유럽에 가서 일류 부띠끄 호텔 같은 데 아니면 앉아보지 못하는 의자’라고 생각면서, 카페에서 4천원짜리 커피를 마시면서 쉽게 경험하게 돼요. 사실 그런 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김명한 사실 내 ‘놀이터’를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aA디자인뮤지엄이라는 놀이터를 만든 거죠. 그 놀이터를 나 혼자 쓰기는 아까워서, 같이 놀아보자는 의미이고요. 카페로서 유명한 ‘흙과 두 남자’도 있지만, B-hind 이전인 1980년대 초반부터 홍대 앞에는 카페들이 몇 개 있었어요. ‘흙과 두 남자’는 1980년대는 후반에 생겼지 않나 싶어요. 카페토랑이라고 하는 아지오는 생긴지 19년이 됐어요. 처음 차릴 때만 해도 파스타 집은 로드 샵으로 처음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파스타를 잘 모를 때라 저 역시 막 만들어도 팔릴 때였어요. (하하하) 메리트는 공간이었죠. 아마 최초는 아니고 최초에 근접했을 거에요. 소위 단독주택을 개조해서 레스토랑도 아니고 카페도 아닌, 양다리를 걸친 집이거든요.
지금 자이 갤러리가 있는 가로수길* 쪽은 카페가 한 달에 하나씩 생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작년 11월 들어오려던 뉴타운이 해제되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뉴타운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인데 그러면서 카페는 퍼진다고 봐요. 저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12년까지 지금보다 이백 개는 더 생긴다고 봐요. 왜냐면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거기에는 정책적인 부분과 부동산의 입김, 그리고 책을 쓴 책임**도 있는 거에요. (*홍대 앞 가로수길은 B-hind가 이전하기 전 서교동 404-26번지 부근에서 상수 전철역까지의 거리를 얘기하는 것임. **임태병은 B-hind 외 몇몇 카페를 만든 경험을 정리해 <<우리 카페나 할까>>라는 책을 공저로 쓴 적이 있다)
이진오 길지는 않지만 추억해보면 홍대 앞에는 여기저기 빈 틈이 많았던 동네였거든요. 뒷골목으로 가면 그냥 주저 앉아 서로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점점 더 밀도가 높아지고 딱딱하게 갖춰지면서, 어디 탈출구가 있을까 해서 자꾸 카페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더 많이 생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게 어디까지 포화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김명한 저는 현재 홍대 앞이 변하고 있는 과정은 긍정적이라고 봐요. 도시에서 카페의 기능은 굉장한 것이에요. 서로 바쁜데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그곳에서 집중력을 높일 수 있고 디자이너들은 구성에 대해 연구도 할 수 있고, 20대는 연애사업을 할 수도 있고요. (웃음)
박치동 홍대 앞이 대한민국 최초의 투기지역이었고 지금도 문제가 많다고들 하는데, 그나마 카페가 최고의 순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 카페가 되지 않았다면 토지구획정리하고 아파트 세우기 너무 좋은 땅이거든요.
이진오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전에 건물주들이 대부분 재력이 있는 분들인 이유도 있죠.
박치동 그래서 사람들도 일단은 장사가 되니까 집을 허물지 않고 있고 버티고 있게 되고, 임차인들은 엄청난 돈을 내야 하고, 그러면서 계속 없어졌다 생겼다 반복이 되잖아요.
임태병 저는 홍대 사람은 아니고, B-hind를 열면서 홍대의 인적 네트워크가 생겼다는 것에 많이 감사해하고 있어요. 사실 홍대 사람들의 커뮤니티라는 게 실체로 잡히지는 않지만, 지나 다니면서 만나고 사무실 가다 만나고, 밥 먹으러 가다 만나죠. 최근에는 오히려 옛날보다 옅어지고 그런 기회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조윤석 저는 제일 궁금한 게 막걸리 파는 아저씨에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셨는데 언제인지 아세요.
김명한 발성이 특별하죠. 2000년도에요. 아지오의 손님한테 막걸리를 팔려다 마찰이 생긴 뒤로 친해졌어요. 그 만큼 특이한 사람이 한 분이 더 있어요. 청소하시는 분인데 머리가 길고 내공이 굉장한 분이에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묵묵히 주어진 청소만 하죠. 그 다음에 홍대 앞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람은 사실 아지오 건물 주인이에요. 그리고 황통장님이라고 쌀집 주인인데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아지오 주인은 인근에 임대해주는 건물만 몇 채 되지만 임대료는 자기 마음이에요. 70대 중반인데, 쓰레기 재활용 봉지 천 장 정도 모아 가면 절반 값만 받고 안받기도 해요. 자기 것이란 거죠. 새벽4시 되면 일어나 골목을 쓸고, 동네 고장난 수도를 다니면서 다 손 보고, 그러면서 생색내는 법이 없어요. 조금 부지런하게 장사하지 않으면 오히려 카페 주인들한테 가서는 야단을 치기도 하구요
그리고 홍대에서 제일 오래된 하숙집인 나교장이 있었고요. 최근에 이관희 내과가 없어졌어요. 종합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있지요. 주치의처럼 여기저기 살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해주고요. 같이 계신 간호사도 굉장히 오래 됐고. 인테리어도 옛날 그대로에요 영화의 한 장면이죠.
한편으로 홍대 앞 사람들은 아나키의 성향이 다분해요. 사실 압구정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에는 아나키의 특성을 지닌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 요소가 홍대 앞의 굉장한 강점이에요. 홍대 앞이 배타적인 면이 되기도 하지만요. 가로수길은 굉장히 세련됐지만 엄청난 적과의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홍대 앞에 와서 풀어요. 밤에 몰래 오죠. (웃음)
임태병 저는 홍대 앞에서 작업실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학교 주변의 지하, 반지하 방을 거의 다 점령하다시피 했어요. 이 친구 방에 놀러 가면 저 작업실 얘기, 그 뒷 작업실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독버섯처럼 포자로 번식해갔어요. 제 기억으로는 홍대 정문을 중심으로 산울림소극장 왼쪽 뒷 블록으로 꽉 차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시대가 변하면서 작업실 문화라든가 커뮤니티가 거의 없어진 것 같고요. 그게 홍대의 변화와 홍대 앞의 상업적인 변화와 일맥상통하는지 궁금한데요.
김명한 시대가 바뀌었어요. 우리가 홍대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 대학 앞에 있는 미술학원이었잖아요. 일명 ‘연어양식장’이라고 하는데요. 전국의 미대를 가기 위해, 그래도 합격률이 높을 것이라 생각하고 홍대 앞에 있는 미술학원을 왔었죠. 홍대로 진학하는 학생도 있지만 아닌 경우 전국적으로 퍼지잖아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몇 년을 다니다 보면 회귀본능이 생깁니다. 다 돌아오죠. 제가 긴 세월 그것을 겪어 봤는데, 그건 굉장한 자산이예요.
배윤호 지금의 홍문관이 있기 전에는 학교의 안과 밖이 잘 구분되지 않았어요. 홍대와 홍대 앞이 하나였는데, 건물이 들어서면서 차단돼 버린 느낌이 들어요. 저는 홍대 벤치에 4년 내내 머물렀던 것 같아요. 홍대가 건물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밀폐돼 있지만, 굉장히 퍼블릭하면서도 개인적이에요. 다른 데서 보지 못한 입체적인 점조직처럼 특수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처럼 직업 없이 전전하며 홍대 앞에 살아야 하는 사람도 많고요, 직업도 별로 없고 갈 곳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밥집이나 컨디션이 최소한 존재했거든요 저는 마포 평생교육원 좋아하는데요. 자생력과 생존권을 잃고 많이 커지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것들이 변하고 있죠.
김명한 하지만 홍대 앞은 생각보다 서울에서는 변화가 느린 곳입니다. 우리가 카페 숫자만 보면 변화가 빠른 것 같은데, 굉장히 느립니다. 다른 동네는 우리보단 속도가 배는 앞서 나가는 것 같아요. 대학로도 동숭아트센터 쪽으로 가면 옛날 모습들이 다 사라졌어요. 전혀 없죠.
조정구 저는 서교동365 연구를 통해 느끼는 변화들이 있는데요. 조윤석 씨도 일찍 관심을 가져주었고, 저는 그냥 단지 신기한 건물이랄까, 신기한 집합체가 있어 하나 샘플링 한다 생각으로 홍대 앞을 왔어요, 2006년에 기록을 했는데, 5년 정도 뒤에 다시 한 번 기록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오면서 보니 놀이터에 마포구청에서 노점을 디자인하고 조명을 달았는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대 앞에 대한 오랜 추억을 가진 사람은 주거지라든가가 사라지는 게 아쉽겠지만, 저처럼 중간부터 본 사람은 홍대 앞이라고 하는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 자생적인 도시의 역사와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변하는 것에 아쉬움이 있어요. 서교365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특히 1970년대를 거쳐오면서 누적된 것이 나타나는 곳인데요,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그리고 더 활발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인데, 고정된 껍질로 노점을 만든다는 것이 너무 한심하더라구요.
배윤호 저는 이번 전시처럼 소통하고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자주 있었으면 해요.
조정구 저는 건축을 하는 작업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배 교수님 말씀하시는, 가볍게 소통하는 차원의 작업들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건축이 정말 무거운 것이라, 사람을 많이 동원해서 해야 할 때는 해야 하고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 있어요. ‘이 정도 생각은 못했지. 이 정도 힘든 걸 우리가 해’ 하면서 보여줘야 할 때도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 작업들도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구요.
얘기를 좀더 하자면 ‘규명과 기록’이라는 것인데요. 도대체 지금의 이 변화는 무엇이고, 지금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그것은 어떻게 규명할 수 있고, 어떻게 기록될 수 있냐를 건축쟁이들끼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다뤄야 하지 않겠냐 라는 것이에요. 그냥 조각을 맞추고 했던 것을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라, 조금 더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저는 주로 ‘삶의 형상’이라고 얘기 하는데, 전시가 있는 더 갤러리도 삶의 형상의 하나일 거구요. 오래된 가게부터 지금의 가게까지 왜 이런 모양을 계속해 왔는지, 홍대 앞에는 잘 나뉜 길이 있는가 하면, 별안간 휘면서 떨어지는 길이 있잖아요. 사실은 홍대 앞이라고 하는 오래된 조직과 토지구획정리와 그 외 다른 것들의 결과로서, 철도가 지나다 폐선부지가 되는 것들을 패키지를 해놓고 남들이 그 패키지를 열고 다시 규명해가는 작업이 있어야지만, 사실 동네건축가로서 SAAI가 갖는 사명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홍대 앞의 모든 지붕을 그리겠다고 해서 다 그린다던지, 그래서 위성 지도에서 보는 홍대 앞이 아닌, 우리가 느끼는 하늘을 떠다니며 홍대 앞을 보는 것 같은 홍대 앞을 만든다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제 일이 아니라서 쉽게 얘기하는 것입니다만. (웃음)
임태병 다음 전시 때나 한 번 해볼 게요. 이번 전시에 그것까지 했으면 저희는 아마 쓰러졌을 거에요. (웃음)
김명한 이제 저도 변하는 것에 대해 구성인으로서 고민하게 돼요. 소위 창작을 하는 사람들,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왜 한국 땅에서는 신념을 세우고 작업을 하기가 힘들까를 수십 년간 고민하다 보니, 결국은 토양의 문제고 토양이 없는 데서 교육을 받고, 신념을 세우려니 빨리 무너져요. 그러다 보니 바빠지고 변하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도시는 변하고 동네도 변하는데요. 우리는 변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흐름을 타고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거에요.
임태병 저희 작은 목표는 사실 동네건축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 상황에서는, 조정구 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동네건축가만큼 되기가 힘든, 그리고 됐다고 해도 그 지위(역할)를 지킨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어서, 그 작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언을 듣고 싶어요.
배윤호 동네건축가는 퍼스널리티가 있는 사람이, 그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축적되면 컨텍스트가 생길 수가 있는데, 그런 맥락이 사라지게 되면 자본이 흐르는 것과 시스템에 따라 사라지게 되거든요. 동네 건축은 작은 듯 하지만 철학적이고 동네건축으로 건축이라는 게 달라지겠죠.
김명한 특히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가장 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있어요. ‘적게, 쉽게, 빨리’라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얘기를 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얘기를 하는데요. 그것을 설득시키고 간극을 좁혀 들어가는 것,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동네건축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 중요한 것 같아요.
조정구 동네라고 하는 것은, 사실 노출되지 않는 속속들이의 세상이라 할 수 있어요.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보면 그다지 이상적인 커뮤니티도 아니에요. 거기에는 전과자도 있고 정신병자도 있고, 어두운 사람도 있고요, 밝게 돌아다니는 사람만을 동네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네건축가라는 것을 좀더 깊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에요. 전시를 통해 보여주신 작업들이 저는 인상 깊은데요, 그런 것들이 대부분 지금 지어지고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만 있다면, 홍대 재래시장이 사라지고 그 밑에 지하로 들어가있는 떡집이라든지, 이웃하는 장어집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골고루 봐줄 수 있는 사람, 그게 건축가의 견지든지 뭐든지 간에, 진짜 동네 사람다운 시각을 갖고 봐줄 수 건축가가 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동네건축가란 말을 좋아하진 않아요. 동네에는 관심이 없는 동네 부자 건축가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을텐데요. 제 스스로 동네건축가라는 말에 느끼는 불쾌함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가 제가 다짐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SAAI도 지금 큰 좋은 출발을 하셨기 때문에, 홍대의 사이사이를 누비는 작업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치동 동네건축가에 대해 잘 몰랐어요.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 동네에 뭔가 제공을 끝없이 해줘야 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아요. 받기도 하겠죠. 받는 게 더 많을 수 있고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사명감 때문에라도 결국은 제공을 하게 될 텐데요. 오늘밤 홍대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이벤트, 그 중에서 가장 특별한 컨텐츠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일 또한 건축가가 할 일이라고 봐요. 건축가가 집을 지어 제공하는, 예전의 사전적 의미의 건축가가 아니라 이제는 프로그램도 같이 제공해주는 게 동네건축가로서 하나의 소명이 아닐까요.
김명한 외국 같이 지역의 공공디자인을 할 때는 주로 지역건축가를 많이 선택하잖아요. 지역건축가를 선택해서 지역정서에 맞는 것을 디자인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시스템이 없는 것 같아요. 옛날 유엔본부를 지어질 때, 그때 의장 국가가 노르웨이였는데 6개 본부 건물을 전 세계 각국의 상임이사국에서 건축가를 선택해서 하나씩 맡겼죠. 영국 같은 경우도 지역에서 뭔가를 할 때는 지역건축가에서 먼저 좁혀 들어갑니다. 여기 마포지역도 뉴타운이 결정 돼있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수용되는지 아무도 잘 모르잖아요. 만약 여기에 연건평 2천 평짜리 건물이 들어온다면 이 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일 거에요. 분명 지역건축가 내에서 살펴봐야 됩니다.
임태병 그런 것들을 조정할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조윤석 보통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마포에서 홍대가 갖고 있는 입지가 워낙 크니까요. 계속 어떤 토론을 만들고 지역 건축가 들이 계속 얘기할 수 있고 축적된다면 가능할 거에요. 금방은 아니겠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만들면 언젠가는 되겠죠.
임태병 스위스에서 공부한 후배가 있는데요. 학교에서 설계 과제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파이널 크리틱 할 때 지역주민들을 동참시켜 시키는데 굉장한 충격 혹은 도움을 받는다고 해요. 그 사람들은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고요.
조윤석 서교동에도 멤버들이 있죠. 한 번은 제가 답답해서 서교동 성당 신부님(박기호)께 ‘홍대 앞이 이래서 되겠습니까, 성당에서 좀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찾아간 적이 있어요. 그때 홍대 앞 유지들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김명한 저도 그 모임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모임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 얘기로 흘러요. 거기에 이권이 연루되기도 하고요. 다른 나라 경우에 건축가 위에 또 다른 프로듀서가 있거든요. 일본도 라이프스타일 프로듀서라고 해서 안도 다다오 위에 또 있어요. 그들이 이 거리를 이렇게 만들자는 컨셉으로 프로젝트에 영향력을 줍니다.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홍대 앞도 이제 만들어야죠. 왜냐면 좋게 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힘을 갖든, 우리가 갖고 있는 아나키적 특성과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권력의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권력자를 적당히 이용해서 권력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거죠. 달리 말해 좋은 디자이너들이 권력자에게 명분을 주고 뺏어 오는 거죠. 조금 기다려보세요, 저도 그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웃음)
이진오 저희가 동네건축가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소규모 아뜰리에를 제대로 잘 꾸려갈 수 있을까 싶은데요. 저희와 연배가 비슷하고 저희 태도가 어떤 것들인지, 어떤 연유로 해서 이런 작업들을 했는지는 평소에 잘 알고 호흡을 같이 하셨던 분들과 함께 자기 처해 있는 상황, 건축하는 상황, 혹은 생활인으로서 건축을 바라본 상황을 나누고 싶은데요.
윤태권 건축가 집단에서 ‘생각을 공유한다’ 라는 것이 궁금해요. 셋이 전혀 싸우거나 하지 않나요. 우기는 일은요?
임태병 일단 셋이 하면 장점이 있는 게, 둘이 하면 의견이 다를 때는 결정이 안나거든요. 그러면 꼭 한 명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돼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다수결은 없었고, 두 명이 의견이 같으면 어떻게든 한 명을 설득을 시켜서 진행하게 돼요. 그리고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 예전에 한 번 농담처럼 한 얘기가 있어요. 나이 어린 스텝이건, 아니면 파트너이건, 혹은 누군가가 들어와서 ‘이렇게 하자’라고 할 때 그 태도가 저희와 같다면 충분히 받아드릴 수 있다는 데 동의를 했어요. 중요한 것은 태도와 자세가 어떠냐 하는 거죠. 폼이 똑같아도 생각하는 방식이나 자세가 다르면 같이 하기 힘들겠죠.
윤태권 중요한 말인 것 같은데, ‘저희 태도와 다르다’라고 했잖아요. SAAI의 태도라는 것이 있는 거에요.
이진오 SAAI를 같이 하기 전 일 년 반 정도 다른 파트너와 작업을 같이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어려서인지 서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만 하지 지지는 않으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는 네 것, 여기는 내 것으로 프로젝트를 한 번 만들어봤어요. 그러면 온전하게 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빠지는 거에요. 그런데 SAAI는 조금 다른 것들이 내가 정말 맞다고 생각하면 더 강하게 주장해도 서로 얼굴 붉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주장하고, 아니면 잠깐 물러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완공까지 함께 한 프로젝트가 이천 SKMS 연구소인데요. 이것은 누구의 디자인이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게 같이 데스크에 모여 서로 얘기하면서 그리면서 결정됐던 것들이기 때문이에요.
박창현 그리고 취향이나 기호는 큰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큰 틀을 헤치지 않는 범주에서 수용되는 것 같아요. 취향의 문제라면 이번은 이렇게 하자고도 해요. 디자인을 갖고 심하게 다퉈본 적은 없구요. 세 사람의 공통적인 성향은 신념이 아니면 쉽게 양보하는 편인 것 같아요.
임태병 세 소장의 공통적인 관심사, 큰 틀은 공유하는 게 많지만, 사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많아요.. 하지만 차이가 나는 부분들은 서로서로 채워주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요.
박창현 상대적인 차이가 약간씩 보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프로젝트에 조금 더 스며들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고요. 그것들은 저희가 이야기를 하면서 조율하는 부분이에요. 그렇다보니 공통의 언어들이 나오지 않나 싶어요. 저희가 ‘우린 이 길로 가자’ 라는 어떤 목표는 아직 없습니다. 어쨌든 저희 작업이 한 데 엮여질 수 있다면 다르겠지만요. 앞으로도 있을까 싶은데요.
임태병 아이디어나 컨셉을 시작하는 부분은 같이 도출하는 경우가 있지만, 프로젝트마다 조금씩 달라요. 그때 상황에서 따라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요. 예를 들면, 평창 국악스튜디오(비탈스튜디오)는 사무실 자체에서 스텝들과 콤페티션을 했어요. 모델이 6-7개 인가 나왔고 클라이언트가 보고 결정한 게 지금의 안이고요, 보통은 대부분 2-3개의 제안이 나와 초기에 정리가 되고요. 처음에 나온 아이디어는 다섯이나 여섯이 될 수도 있는데, 얘기를 하다 보면 두세 방향으로 좁혀지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2-3개를 보여주면 그 중에 선택되고 진행이 되요. SAAI에서는 일반적인 방식이에요.
신창훈 보면 시작하는 포인트가 서로의 작업에서는 존중해주는 것 같아요. 사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다든지, 뭔가 형태를 좀 다르게 만들어본다든지 하는 실험은 미리 선을 긋고, 공간에 집중하려는 것이 보여요 디자인하는 툴이 안되기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분명 내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요. 가령 장천리 주말주택에서는 나뭇가지 모양의 축으로 형태가 느슨해진 것 같아요. 왜 그랬는지, 그것을 정해야 하는 폼이 있었나요.
임태병 그것도 같은 방법이었어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는데, 셋 다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었어요. 하나는 비교적 안전한 ‘보험’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대지 흐름 따라 산책길이 흐르다 작은 오브제에서 마쳐요. 전체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도록 매스를 다듬으면서 정리했어요. 건축주는 첫번째 안은 아예 보지도 않고 두번째 세번째 안에서 고르게 되었어요.
두번째, 세번째 안은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였어요. 하나는 전체 길이가 120m 정도 되는 과격한 안이었는데, 바닥에서 부양하듯이 표현하려고 했어요. 사실 성격은 다른데 크라이언트 입장에서는 두번째 안이 지어진 것들과 비슷해 보였나봐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지금의 안이 선택되었어요. 초기 안은 훨씬 러프 했었고요.
이진오 저 세 가지 안은 사람들간의 관계가 긴밀할 것, 중간적일 것, 느슨할 것으로 구분이 되고, 그것은 클라이언트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죠. 여러 대안을 클라이언트에게 가져가는 방식에 어떤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죄악시되는 분위기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가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하는 것들은 저희 셋이 다 만족하는 안이에요. 만약에 저희 셋이 ‘하나가 정말 답이다’라고 하면 하나를 가져 가겠죠.
서승모 저도 내부에서 대안을 많이 만들지만,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는 하나가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검토하고 조건에 맞춰서 풀어가잖아요. 그리고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한 최적의 해를 찾아가지만 폐기한 안들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하게 돼죠.
박창현 저희도 그런 태도와 다르지는 않고요, 그 상황이라면 저희는 스터디 과정에서 대안이 여러 개가 나와요. 저희는 클라이언트와 얘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대안별로 각각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죠. 가평주택은 최종적으로 두 가지 대안을 갖고 갔어요. 클라이언트는 왜 스터디 했던 다른 안을 가져오질 않았냐고 하지만, 그렇게 진행하는 방법이 클라이언트와 만나서 진행하는 예로서는 편했거든요.
이진오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건축이 예술이라고 생각치 않거든요. 허버트 리드의 얘기를 빌어, 약간의 손상이 있어도 성립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이 예술이라면, 저희는 건축은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보편적인 다양한 해가 있을 텐데요. 저희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해가 아니라도 이것도 보여드릴 수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보여드려요. 하나가 선택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다듬는 데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이죠. 다행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것이 제일 저희 마음에 드는 안이 항상 선택 돼요.
신창훈 가만 보면 재료에 대한 부분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겉보기에는 재료의 선택에 대해 신중을 기한 것 같은데요. 어떤 용도라든 지에 대해서요.
이진오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재료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양구 방산자기박물관의 다짐 흙벽이나 SKMS 연구소의 숙소동의 반절 벽돌쌓기인데요. SKMS 연구소는 벽돌을 길이 방향으로 반절 나누어 두께를 훨씬 얇게 만들었어요. 두께가 얇은 벽돌을 쌓다보면 쌓인 층이 많아지게 돼죠. 벽돌과 중력과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는데, 예민하신 분들은 금방 알아채시더라구요. 원래부터 비싼 재료를 쓰는 대신 노동량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재료를 쓰려고 해요. 재료비보다 인건비가 비싸질수록 건축은 더 바람직해진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구요. 대신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힘들어하시긴 하죠. 하하.
임태병 아시겠지만, 저희는 서울에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거든요. 저희 관심사 중에 하나가 서울에 언제 해보나거든요. 어쨌든 경관이 좋은 특별한 사이트에 특별한 건물보다는, 건폐율이나 사선제한 조건이 까다로운 ‘악다구니’ 같은 것들을 좀 해보고 싶어요.
신창훈 저도 설계할 때 그런 것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요.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특별한 방법이나 기준이 있나요.
박창현 이천 프로젝트 경우는 1, 2차 모두 경쟁을 거쳐 진행된 것인데, 사실 SAAI 이름으로 콤페티션에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콤페티션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경제력과 조직력이 뒷받침이 돼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희는 전혀 손도 못 대죠.
임태병 관심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선 콤페티션에서 새로운 건축 아이디어나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그걸로 인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스타덤에 오르고, 수주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사실 저희는 어떤 경위로든 저희한테 일이 맡겨졌을 때, 일이 끝난 다음 클라이언트가 저희를 믿을만하다 생각해서 다음 일에, 혹은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소박하지만 저희의 최대 관심사일 거에요. 일을 어떻게 수주하느냐가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려고 하죠.
SKMS 연구소의 경우, 완공된 것도 있고 보류된 것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비교적 그런 관계를 잘 유지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그러리라는 믿음으로 하고 있어요.
이진오 그래서 일을 거절하기도 하는데, 한 번 심각하게 의견이 다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임 소장님이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신념이라고 해서 거절했죠.
임태병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요. ‘잘 하지 못할 것’ 같은 프로젝트는 많이 거절하게 돼요. 누군가 제시를 했는데, 사무실 상황에서는 이것을 하려면 너무 힘든 것이에요. 그리고 일정이나 금액에 대한 부분도 있어요.
어떤 루트를 통해서라도 그런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저는 제 신념에(같지 않은 신념이지만)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나머지 두 분으로서는 다른 가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진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항상 셋이 같이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프로젝트를 버리게 되거든요. 사무실에서 운영방침에 있어, 저와 약간 이견이고 그럴 때 저로서는 굉장히 아쉬운 점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좀더 유연한 사무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신창훈 같이 일하는 스텝이 어떻게 되나요.
임태병 8년 차 되는 친구 한 명, 사무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 오픈 데스크(open desk)를 통해 통해 온 친구가 둘 있고요. 그렇게 정규 직원이에요. 저희도 소장이 아니라, 사무실에 오래 상주하는 스텝이에요. 함께 하는 동료들 모두 미래의 건축가라고 생각하고 대하고 있죠.
이진오 현재의 시스템에 맞게 프로젝트의 수를 조절하려고 합니다. 사실 시스템을 갖추는 게 처음 시작하는 건축가들에게는 이상이잖아요. 저희도 7명까지 정규 인원을 짜 본 적이 있는데요. 예상대로 되었다면 건강하고 풍성한 상황이 되었을 거에요. 예상대로 되지 않아서 그 친구들과 아프게 이별을 해야 했던 것이 저희한테는 큰 시련이었어요.
임태병 직원을 한 명 채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사회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설계사무소의 고용을 더 늘여 건축가가 사회공헌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불완전한 상황이 항상 그것을 보장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희는 분명 책임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끊임없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겠다고 했는데, 그게 상황이 되질 못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 상황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은 저희를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위해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윤태권 만약 좀 덩치가 큰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다른 사무실과 조인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보지 않나요.
박창현 실질적으로 당연히 그렇게 하겠죠. 그런 기회가 오면 잘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어떤 것일지 고민하고 있어요. 어쨌든 우리가 내부적으로 다 해결하자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기회가 온다면, 다른 사무실, 다른 팀, 다른 파트너와 어떻게 공조를 해서 프로젝트를 실현시킬까 하는 관심과 네트워크는 꾸준히 가지려고 해요.
이진오 큰 프로젝트를 하려면 어느 정도 인원이 갖춰져야 되는데, 스튜디오를 지원하는 친구들이 없어요.
서승모 세계적인 건축가를 꿈꾼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스텝이 받쳐줄 때 얘기에요. 그리고 그 스텝들이 희망을 갖고 여기서 일해서 재미있다, 그 다음에 독립해야겠다 라면 독립할 수 있어야 하구요.
신창훈 작은 사무소들끼리 뭉쳐서 프로젝트에 대해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임태병 일을 할 수 있는 게 집단과 집단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조금 더 자유로운 방법이 어떤가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포잠박 사무실처럼 프로젝트별로 팀이 꾸려지고 진행되는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을 거에요. 저희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무실이 하고 싶어 하는 모델에 가깝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죠. 사회보장제도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개념도 우리와는 다른 사회에서 가능할 것이구요. 나온 얘기처럼 사람도 없을 뿐더러, 행여나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개 불완전한 상황의 작은 아뜰리에에서, 언제 어떻게 그만 둘지 모르는 상황에 모험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죠.
박창현 아무튼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는 더 느리게 느리게 갈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아니, 느리게 라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가야 하는 거겠죠. 저희가 조금 힘들더라도 더 해보자는 방향으로 가려고 해요. 그래도 5, 10년 뒤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습니다.
WIDE 2009 09/10 강권정예 jeongye골뱅이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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