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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서울을 보다

자료실/도시건축

by 정예씨 2011. 7. 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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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서울을 보다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를 통한 평양의 도시 건축 읽기


작년 겨울 어느 갤러리에서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의 사진 몇 장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한국’을 소재로 한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들(Korea 2007-2010) 중 ‘평양 북서동’은 흡사 잠실 지역이나 새 도시의 주거 단지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가로를 따라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고층 건물들은 사진 속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자 했을까. 핵 무기와 기아의 나라 북한, 그곳의 수도 평양의 모습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19세기 파리를 근대도시로 만들어 낸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주거 환경을 개선하였지만, 일부 귀족과 지배 계층의 주거에 제한을 둠으로써 공간적 차별을 낳았다. 당시 엥겔스가 지적한 도시재개발의 문제점이 15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도 같이 발견된다면, 그와 같은 문제 인식과 반성에서 출발한 사회주의 도시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전지구적 이슈 중 하나인 탄소발자국이나 마을 단위의 공동체, 도시 농업과 같은 개념들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 권의 책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임동우 저, 효형출판)의 시의적절한 출간을 반기게 된다.

사진 속의 북서동 주거들도 1970년대 이후 평양의 인구가 늘면서부터 건설된 살림집들로, 도로변을 따라 고층 주거들이 배치되어 주요 도로의 가로 경관을 바꿔 놓았고, 또 노후화되어 가고 있다. 책에서는 이러한 평양의 변화를 인티그럴 어바니즘의 입장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회주의 도시의 뼈대 위에 자본주의의 옷이 입혀질 때 가장 큰 변화가 예측되는 곳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철학이 가장 잘 구현된 공간이다. 그 공간의 물리적 변화는 가능성과 동시에 한국의 도시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다시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이다. 결국 우리가 평양의 도시 건축에서 보아야 할 것은 민족적 동질성보다 삶과 도시 건축에 대한 보편적인 입장이 아닐까 한다. 글/강권정예(본지 객원기자)   관련 자료 제공/프라우드 PR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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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역사도시다. 서울이 산의 도시라면, 평양은 이름 그대로 평평(平)하고 너른 대지(壤)다. 서울이 백악, 인왕, 목멱(남산), 낙산, 네 개 산의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을 쌓았다면, 평양은 모란봉(95m), 대성산(270m) 정도의 나즈막한 산과 강을 경계로 해서 평양성을 쌓았다. 그리고 한강 폭의 절반 정도인 대동강과 지류인 보통강이 (청계천이나 중랑천 보다) 도시의 훨씬 많은 부분을 지나가는, 강이 발달해 있는 도시가 평양이다.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427년) 때 평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그때 자리를 잡은 것이 대성산성과 안압궁이며,방어용 토성도 쌓고 안압궁 아래로 백성들이 사는 도시를 바둑판처럼 만든다. 위로는 왕궁, 아래는 백성들이 사는, 이원적인 도시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평온왕(586년) 때 지금의 평양인 평양성을 만드는데, 강과 모란봉 산 사이에 호리병 모양으로 쌓은 성은 당나라 장안성에 빗대어 불리기도 했다. 평양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 내성에 왕궁이 있고, 중성에 관공서가 있고, 외성은 백성들의 거주지, 북성은 방어기지로 네 겹의 구조이고, 외성 쪽은 바둑판 모양으로 직각 방향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평양 도성의 구조는 고구려 때부터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까지 내려온다.

이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 일제시대인데,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조와 어긋나게 철도가 지나고 평양역이 들어선다. 그리고 역 앞으로 도로가 나고, 군부대나 시설을 배치하면서, 원래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도시 체계가 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폭격으로 평양은 폐허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 평양에 투하한 폭탄은 태평양 전쟁 당시 5년간 쏟아 부은 폭탄 전체의 양과 맞먹었고, 폭격으로 평양 시가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격을 피한 건축물은 미군이 지표로 삼고자 남겨놓은 옛 평양성의 남문 대동문이 유일한 것이었다.

1 도시 다핵화를 위한 광장과 녹지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역사 도시의 면면은 한 건축가의 마스터플랜에 의해 새롭게 구축된다. 평양은 전쟁 이전인 1948년 북한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이미 도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보통강 개수 공사를 마치고 그를 기념하는 개수 공사 기념탑을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평양은 이상적 사회주의 도시 건설을 위한 도화지 같은 곳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도시 계획의 대표적인 특징은 선형 도시로, 중심 없이 기다란 형태를 띤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동심원 형태나, 철도나 지하철이 중심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핑거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평양의 경우도 이 같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짓지 않도록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다. 평양을 몇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누고(소단위 구역 계획), 지역 마다 상징 광장이 하나씩 조성되어 그 지역의 핵과 노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로를 비롯한 도시 기반 시설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한다. 그 사이사이 완충 지역 역할을 하는 것이 녹지 인프라(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 강, 산, 그리고 농업 용지 등을 포함)이다. 평양에서 유원지와 공원 시설은 녹지 인프라의 대표적인 요소로 대부분 평양의 자연 지형을 따라 계획되었고, 일부는 이 자연 지형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리고 위성 사진을 보면 농업 용지가 평양의 외곽에서 안쪽으로 침투하는 모양새로 방사형을 띤다. 서울이 그린벨트라는 이름으로 명확한 선을 그어 도시 팽창을 억제하고 도시민들에게 공원을 만들어 녹지를 제공하는 것과는 차이가 큰 지점이다. 김일성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0km 안의 시가지를 볼 때, 그 안에 주요 농업 지역이 여럿 나타나는데, 시가지와 농업 지역이 특별한 공간적 구분이 없다. 여기서 녹지 인프라는 도시와 농촌의 공간적 구분이 아니라, 그 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역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동강과 보통강의 양안, 그리고 주요 도로 주변이 대표적으로 1980년대부터 조성되었으며, 시민 1인당 녹지 면적은 약 40㎡에 이른다. (서울은 16㎡, OECD 국가 평균 20㎡) 평양의 별칭이 ‘공원 속의 도시’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녹지와 광장을 이용해 평양을 다핵화하는 방법은 건축가 김정희에 의한 1953년 평양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이다. 이 마스터플랜의 중요한 의미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해소, 이로써 궁극적으로 계층의 차이를 소멸하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과도 상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지역적 균등을 위해 고안된 상징적 광장은 그 지역 내에서도 공간적 위계 질서를 갖지만, 이 모든 광장의 중심에는 김일성광장이 있다. 그곳이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선전하고, 상징하는 가장 핵심 공간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김일성광장만으로써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2 도시 상징 공간과 축을 형성하는 광장, 기념비적 건축물

김일성광장과 상응하는 상징적 공간이 바로 대동강 맞은 편에 배치된다. 대동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배치된 상징 공간은 평양의 평양의 도시 핵심 축을 형성하며 도시공간을 만들어 왔다. ‘주체탑—김일성광장—인민대학습당’으로 이어지는 축이 평양의 제 1 핵심 축으로, 평양의 동쪽과 평양 중심부를 연결한다. 그리고 또하나가 ‘조선혁명박물관—김일성동상—공산당창건기념탑(망치, 붓, 갈고리 모양의 조형물)’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2축이다. 여기서 김일성광장은, 광장을 형성하는 조선역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이 당시 동유럽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1950년대 완공이 된다. 그리고 인민대학습당(국립도서관)이 제1 중심축에 놓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김일성광장이 있는 지역은 사회주의 도시 평양을 상징하는 곳으로서, 이념 선전과 민중 선동의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아울러 대동강을 기준으로, 김일성광장이 있는 서쪽 영역과 주체탑이 있는 동쪽 영역을 묶고 있다. 새로운 개발 영역인 강동 지역과 기존 도시가 존재하는 강서 지역이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 하나의 도시를 구성함으로써 김일성광장 주변 지역과 함께 마스터 플랜에서 이루고자 한 평양의 중심 영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기념비적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가 1970년대에 건축된 것이다. 인민문화궁전, 조선혁명박물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평양체육관, 만수대예술극장, 4ㆍ25문화회관 등은 1970년대 준공이 되는데, 모두 연면적 5만㎡가 넘는 대형 건축물들이다. 특히 만수대광장의 만수대 대기념비(1972년 김일성 회갑 기념 준공)는 김일성광장과 함께 주요 광장 역할을 한다. 조선혁명박물관과 함께 만수대 지역을 평양의 또 다른 주요 상징 공간으로 만들게 된다. 특히 비교적 경제나 체제가 안정돼 있던 1970년대에 지어진 건축들은 한옥의 모티브를 살린 건물이 많다. 인민대학습당, 평양대극장, 인민문화궁전이 대표적으로, 콘크리트 구조이기는 하지만 한옥 지붕을 취한다. 그 시기 사회주의 도시 계획과는 또 다른 조선 사회주의식, 즉 주체사상에 입각한 평양의 도시 건축이 다시 조성되기 때문이다.

자급 자족 공동체를 위한 소단위 구역 계획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도시에서 녹지 면적을 확보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평양에서도 녹지 공간의 일부는 농업 용지로 설정되었는데, 평양에서 도시 조직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기본 방식이기도 하다. 즉 주거와 생산 시설을 결합하는 것이다. 250×250m 규모의 격자형 소구역을 기본으로 지역을 구성하고, 지역이 모여 평양을 구성한다. 여기서 지역마다 상징 광장이 하나씩 조성되고, 도로를 비롯한 도시 기반 시설이 지역 간 연결을 이루고 녹지 인프라가 사이사이에 결합이 된다. 주구 단위는 주거, 생산, 소비, 교육, 부대 시설을 함께 둔다. 규모 역시 걷기가 가능한 거리를 기준으로 규모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생활 체계를 구성하는 소단위 구역 계획은 복합 주거 단지를 지향하면서, 소구역이 하나의 자생적 주구 단위가 된다. 이러한 도시 공간 체계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배경은 주거 전용 지역과 공업 밀집 지역에 딸린 주거지는 환경적 차이 때문에 지역간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두 지역 주민 간의 계층적 분리를 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주거 지역이 일정한 비율의 생산 시설과 상업 시설, 공공 시설을 포함하고 있다면, 환경적 이유로 생기는 지역 간 격차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연히 보행 위주의 환경과 주민들은 종일 넓지 않은 반경 안에서 생활하므로 구역 내 차량 운행을 활성화할 이유가 없고, 통근 거리와 시간이 줄어드는 점에서 최근에는 친환경적 계획으로 다시 주목 받고 있기도 하다. 특히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와 물품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탄소 발자국이나 탄소 라벨링, 도시 농업과 같은 개념들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소구역 계획이 가장 잘 실현된 곳은 바로 김일성광장 맞은 편의 대동강 동쪽 지역이다. 이 소구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역의 가장자리에는 주거 시설, 내부에는 기타 공용 시설과 작업장이 배치되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보는 주거 복합 건물과는 사뭇 다른 배치다. 소구역 내의 작업장과 공용 시설은 구역 내 주민을 대상으로 하기에 외부에서의 접근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며, 구역의 외곽으로 고층의 선형 주거 시설을 배치하여 가로 경관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선전 효과도 영향을 미쳤다.

4 가로의 경관을 만드는 주거 타이폴로지

평양은 거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소구역의 외곽으로 선형 주거를 배치하는 특성 때문에 평양의 도시화는 주요 거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강남, 잠실, 목동 등 특정 지구를 중심으로 개발을 진행한 서울과 달리, 평양은 주요 거리를 확장하고 개선하면서 그 주변 지역을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개발하는 노력과 도시화를 병행했다. 평양의 대표적인 거리로 천리마거리는 초기에 만들어진 거리이다. 이와는 달리 사뭇 다른 모습으로, 현재 평양의 모습을 형성하는 가장 특징적인 곳이 1980년대부터 조성된다. 만경대구역 내 광복거리와 락랑구역 내 통일거리로, 1953년 마스터플랜에서는 계획돼 있지 않은 지역이다. 1980년대 서울에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고, 평양에서는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린다. 평양은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하면서 거리 조성과 경기장 시설들을 대거 건축하는데, 청춘거리, 광복거리가 대표적이다(만경대는 김일성 생가가 있고, 광복거리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탄생지가 있는 칠골에 조성된다). 이 곳에 소위 비반복적 형태의 주거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신시가지로 개발된다. 비슷한 시기에 통일거리가 함께 만들어진다. 반면 김일성광장이 있는 구역에서 강 건너 대동강구역 역시 초고층 살림집으로 개발이 된다. 이러한 198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지역의 도시 계획과 다양한 형태로 들어선 고층 건물들은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건축 예술론의 핵심인 비획일성과 비반복성이 표현된 것들이다.

5 인티그럴 어바니즘과 모더니즘 도시 계획의 교훈

현재 평양의 가로 경관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도시들의 획일적인 경관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길을 중심으로 도시 계획이 진행된 평양에서는 길과 길이 만나는 교차로 부분에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건물들이 들어서는데, 이 점은 길을 지나갈 때 보이는 경관과 눈에 보이는 도시의 미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회주의 도시 계획이 체제 우월성을 눈에 보이는 경관이나 형태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최근에 많은 비판 점이 되기도 한다. 결국 파리나 런던, 프라하와 같은 도시가 될 것인가, 상하이나 푸동과 같은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입장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평양은 1990년대를 지나면서 도시 노후화가 진행되고 도시 관리의 측면에서 그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에서는 몇 가지 제안을 두는데, 그 전제로 자본 시장의 개방을 필연적인 것으로 두고 있다. 그럼으로써 평양의 도시 공간이 갖는 잠재성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가치가 대치되는 곳에서 더욱 드러난다. 예를 들면 상징 공간인 인민대학습당에서의 프로그램 치환, 김일성광장의 공간 재구성, 류경호텔과 주변 지역의 도시 재개발, 소단위 구역으로 계획된 지역에서 생산시설에서의 용도 변화이다. 그 방법에서 인티그럴 어바니즘(현재의 도시 조직을 기반으로 한 물리적 환경의 점진적인 변화)의 자세를 주장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 도시의 지속성을 갖는 것은 도시민들의 활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정석(경원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더 한다.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것, 도시가 생명력이 넘치고 살아 있으려면 길이 살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걷는 보도가 중요하다. 어느 도시나 길에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은 살아 있는 도시고, 길이 썰렁한 도시는 죽은 도시다. 지금껏 모더니즘 도시는 길을 죽이고, 그 대신에 오픈 스페이스를 살린다는 명분 하에 건물 안에 많은 것을 복합시켜 왔다. 특히 재개발 지역의 길을 걸어 보면, 건물은 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사이에는 주차장이 있기도 하고 화단이 있기도 하다. 건물과 나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길에서 빨리 갈 생각밖에 갖지 못한다. 종로나 인사동, 남대문 지역이 거리에 북적이는 사람들로 활력이 넘치는 것은 모두 길에 면해서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1층에서 가게와 상점들이 즐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재미있게 한다. 결국 사람들에 의한 도시의 활력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인티그럴 어바니즘에서 주장하는 도시 설계는 1950년대 등장한 새로운 프로페션이다. 우리는 건축, 조경, 환경, 토목 분야와 달리, 도시 설계(어반 디자인)라는 새로운 프로페션의 등장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존의 프로페션들이 시대의 사회적인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라는 것과 새로운 프로페션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프로페션으로서 건축가의 역할은 ‘공적인 것’으로 중요해지는 이유다. ⓦ

01 평양 중심부와 대동강
01 평양시가지 위성사진
02 평양의 제일 핵심 축 김일성광장 주체탑
03 평양의 제일 핵심 축 인민대학습당
04 1950년대 평양의 마스터플랜 스케치
05 평양의 주요 녹지 축
06 평양의 녹지 공간
07 평양의 주거 분포
08 평양의 주요 상징물
09 주체탑에서 촬영한 대동강 동쪽 소단위구역계획 지역
10 중층형 주거 타이폴로지
11 고층형 주거 타이폴로지
12 평양의 상징적 건축물과 기념비
13 평양 주요거리의 형성 연대
14 광복거리
15 통일거리
16 청년거리
17 새살림거리
18 마이크로 디스트릭트
- 마이크로 디스트릭트 개발 단계도
- 새로운 개념의 마이크로 디스트릭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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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임동우
인티그럴 어바니즘과 건축의 방법

평양/북한의 도시 건축 연구 현황

참고 문헌에 해외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연구나 관심이 덜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실제로 현재까지 평양이나 북한의 도시에 대한 국내외 연구는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방향은 어떠한가. 임동우 연구의 출발이 사회주의 도시였던 동유럽의 도시들에서 시작되었다. 그 도시들의 지난 20여 년간 변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평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유럽 혹은 러시아, 중국에 대한 해외 자료가 많았다. 이미 개방화가 진행되고 도시의 물리적인 환경까지 바뀌고 있는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선행 연구가 있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자료가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은 북한이 제한적인 정보만 공개하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고, 국내는 그 동안 관심이 적어서일 수도 있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몇몇 학자들이 꾸준히 진행해 온 연구 성과가 있다. 이왕기 교수님은 북한 건축 전반에 걸쳐 역사와 양식 등을, 김원 교수님은 북한의 도시 발달과 계획적인 측면을 많이 연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김현수 교수님은 평양과 서울의 도시 공간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하셨다. 그럼에도 북한의 도시/건축 관련 인프라는 전반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특히 사회, 정치 분야와 비교했을 때 그 관심과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국내 출판 시장의 분위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해외에서는 건축가 자신의 견해나 시각을 피력한 출판물이 많은 반면, 국내에서는 읽기 어려운 전문서와 비전문적인 수필집(또는 기행문)으로 양분돼 있는 듯하다. 논문을 제외하면 국내 도시에 관해서도 자료로 인용할 만한 출판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번에 책을 준비하면서, 또 출판 이후에 비슷한 주제로 접근하려는 건축 관련 종사자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저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관심과 시각은 이전 세대와는 다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북한 관련 주제로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는 출판물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한국 도시 건축에 대한 비판적 견해

현재 한국의 도시 건축 상황을 볼 때, 평양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이나 교훈 같은 것들이 있을까. 임동우 사회주의 도시 계획 방법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점들이 많다. 책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사회주의는 애초에 자본의 성장으로 인한 도시화의 문제점들을 직시하면서 그 이념의 바탕이 성립하였고, 사회주의 도시 계획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 자본주의 도시들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서울같이 급속히 성장한 도시들에서는 도시화의 문제 해결보다는 도시화에 더 집중한 것이 사실이다. 성장의 속도가 한결 늦춰진 현재 서울을 비롯한 국내 도시들에서 사회주의 도시 계획에 나타나는 방법론들을 한 번쯤 되짚어 볼 만하다. 실제로 어떤 이는 사회주의 도시 계획론이 요즘 유행하는 지속 가능한 계획(Sustainable Planning)의 근간이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도시와 도시, 도시 내 구역과 구역 사이의 균형 있는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도시 계획은 작위적인 재개발을 반대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지역간의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점은 현재 국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재개발 논리에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도시라는 것이 사회의 요구와 가치를 반영하는 것인 만큼,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균형과 분배라면 도시는 이를 반영할 수 밖에 없고 도시 조직들도 변하지 않을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재개발의 논리는 아직 균형보다는 불균형적인 사회구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따라서 사회주의 도시에서 주는 교훈은 많지만,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먼저 변화해야 한국의 도시들도 따라서 변화하지 않을까 한다.

인티그럴 어바니즘과 건축의 방법

인티그럴 어바니즘의 견지에서도 북한 사회나 문화, 여러 가지 현실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접근 자체가 제한이 많지만) 필요한 노력이나 견지해야 할 태도, 자세가 있을까. 임동우 건축가의 입장에서 프로젝트가 있는 국가나 도시의 문화, 사회, 역사 등에 대한 이해는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는 제너럴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프로젝트를 위하여 알아야 하는 것들의 깊이는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건축가에게 북한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한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실을 깊게 알고 있는가 보다 어떠한 시각과 입장을 갖고 있는가, 이다. 인티그럴 어바니즘은 기존의 도시 조직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사회의 변화에 대응해 나아가는 시각을 대변한다. 북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 건축가라 해도 기존 도시 조직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그것은 평양이 다른 도시와 달리 특별한 보존 가치가 있어서라기보다, 모든 도시의 조직은 그 존재만으로 존중 받아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이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인티그럴 어바니즘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의 보존이라는 측면과는 분명히 구분이 된다. 평양이 개방(혹은 통일) 이후 하나의 도시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안은 그 변화를 도시 조직 내에 수용하는 것이지, 도시 자체를 박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몇 개의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고, 또 계획되고 있는지 다 알기도 힘들다.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기존의 중소 도시들이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면 된다고 보는 등의 시각은 결국 결과에서 큰 차이를 가져 온다.

평양의 특성에 적용할 수 있는 건축가로서 건축(설계) 방법론이 있는가. 임동우 인티그럴 어바니즘의 시각에서도 실천 방법론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가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키 빌딩(key building)’과 ‛타이폴로지(typology)’에 의거한 점진적 변화에 주목한다. ‛키 빌딩’은 주변의 도시 조직뿐만 아니라 대중 문화와 도시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아이코닉 프로젝트(iconic project)’와는 구분된다. 모든 ‘키 빌딩’은 ‘아이코닉 프로젝트’일 수 있지만 모든 ‘아이코닉 프로젝트’가 ‘키 빌딩’이 될 수는 없다. 쉬운 예로 구겐하임 빌바오가 ‘키 빌딩’이 될 수 있는 것은 형태나 방문하는 외부 관광객 때문이 아니다. 주변의 인프라 스트럭처와 공간을 하나로 아우름으로써 도시 설계에서 계획한 수변 공간과 기존의 도시 조직을 엮어 주는 역할과 동시에, 이로 인해 시민들의 새로운 도시 활동이 발생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평양에는 수많은 ‘아이코닉 프로젝트’들이 있다. 규모나 양식 면에서 의미가 있고 보존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평양이 개방이 되고 개발이 이루어질 때 훌륭한 도시 인프라로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키 빌딩’으로 변화하여야 도시의 점진적인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일성광장과 인민대학습당은 유일무이한 도시 공간과 ‘아이코닉 프로젝트’이다. 이들이 ‘키 프로젝트’로서 도시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주변 도시 조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상징성 면에서는 좋았지만) 이들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도 과제일 것이다. 평양에 산재하는 ‘아이코닉 프로젝트’들을 경우에 따라 ‘키 빌딩’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일차적인 단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타이폴로지이다. 타이폴로지는 건축 미학적인 관점에서 주목 받기 힘들지만 실제로 도시 공간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특히 반복적인 구성을 하는 주거 타이폴로지가 그렇다. 한국의 가로 경관이 네덜란드와 다른, 주된 이유는 도로의 폭이나 가로수 때문이 아니라 가로형 주거 타이폴로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평양에서는 초고층 주거 단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블록의 외곽부에 중층의 선형 주거 타이폴로지를 배치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간간히 배치되는 고층 주거가 평양의 가로 경관 및 공간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평양이 개방된다는 얘기는, 간단히 말해 북한에서는 그동안 없었던 계급이 생겨나고 토지의 가치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는 새로운 주거 타이폴로지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평양의 사회 구성과 도시 조직을 반영하는 새로운 타이폴로지의 개발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남북한 도시/건축 교류

이전까지의 대북 사업들이 경제 협력이나 인도주의적 차원,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교류로 많이 진행되고 있는 듯 하다. 도시/건축의 전문성을 띠고 할 수 있는 교류들이 있겠는가. 임동우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한 명의 건축가로서 건축계에 던지고 싶었던 화두가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 동안 북한의 건축과 도시에 깊이 연구해 오신 선배님들이 계셨지만, 그러한 노력의 맥이 지금은 좀 단절된 느낌이다. 그래서 좀 더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그 동안 북한의 도시와 건축 자체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있었다면, 이제는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앞으로 평양이 개방된다고 하면 평양의 도시 조직은 어떻게 바뀔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다른 수많은 질문들이 있을 것이다. 평양의 많은 기념비적 건축물에는 모자이크와 북한산 대리석이 많이 쓰이는데, 어떤 이는 ‘국내 프로젝트의 마감 재료에 북한산 대리석을 쓰면 어떨까’, ‘컴퓨테이션을 이용한 패턴을 북한의 모자이크 제작 기법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작은 관심과 언론이나 출판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노력이 그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 이후에 북한 건축계와의 교류나 국제 건축계에서 북한 관련 화두를 이끌어 나아가는 것은 그러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이후에 결실로 나타날 때쯤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건축계에 국한 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그 동안 한국에서 북한에 대한 모든 논의는 통일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하지만 통일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전제로 한 것은 ‘개방/변화' 였다. 시기가 언제가 되었든 북한의 개방은 정해진 수순이다. 이후 그 시장을 한국이 선점할지, 중국이 할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는 중국에 시장과 경제가 선점된 이후에도, 과연 북한이 남한과 통일을 하고 싶어 할까,는 굳이 묻지 않아도 쉽게 답이 예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양은 도시/건축적으로 충분한 잠재성이 있으니, 우리가 먼저 교류하고 선점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시작하고 싶었다. ⓦ

임동우  1977년 생.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의 저자로, 현재 미국 보스톤에서 프라우드(PRAUD; Progressive Research on Architecture, Urbanism and Design)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건축 프로젝트와 여러 리서치들을 진행 중에 있다. 연구는 도시 컨텍스트와 연계한 건축적 타이폴로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를 통한 도시의 점진적인 변화(Integral Transformation)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로 입학하고, 이후 건축공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도시설계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한국의 정림건축과 미국 마차도 & 실베티 어소시에이트(Machado-Silvetti Associate)을 비롯하여 일본(Maki & Assoc.)과 네덜란드(West)에서 실무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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