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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모레노와 15분 도시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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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당신은 소르본 대학의 기업가정신, 영토 및 혁신(ETI) 석좌의 과학 디렉터이기도 합니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수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당신에게 이 개념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혁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단절의 과정, 즉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절대 실현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하죠.

따라서 혁신적 단절(innovation de rupture)이란,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을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거나 왜곡하더라도, 이를 견뎌낼 수 있는 정신적 힘, 과학적 신념, 그리고 확신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런 도전을 즐깁니다. 저는 언제나 기존의 흐름에 맞서 왔습니다.

M-19에 참여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고, 거기에서 나온 것도 흐름을 거스르는 선택이었습니다. 로봇 공학을 공부했고, 이후 스마트 시티 개념을 연구하며 다시 기존의 틀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도시를 기술이 아닌 서비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로 전환했습니다. 이런 도전이야말로 저의 본질적인 정체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로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 당신의 전공은 그 분야가 아닙니다. 당신의 직업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저는 우선 대학 교수이자 연구자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저는 수학, 컴퓨터 과학, 전자공학, 로봇 공학의 세계에서 출발했으며, 현재는 도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가장 잘 정의하는 요소는 제 오랜 친구이자 지적 스승인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올해 102세이며, 곧 새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저는 25~26세 무렵 그를 처음 만났고, 그의 사상이 제 연구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에드가 모랭은 복잡성(complexité) 개념의 창시자로, 모든 사상을 이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분석하는 상황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성과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복잡성이란 결국 ‘함께 엮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별적인 요소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죠. 따라서 저를 정의하자면, 저는 복잡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학문적 방향이며, 제 연구의 핵심 원칙입니다. 

 

 

당신은 1959년 툰하(Tunja)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서 오래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은 어디로 이주했나요?

네, 저는 1959년 툰하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업상 여러 곳을 옮겨 다니셔야 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툰하에서 보고타(Bogotá)로, 다시 이바게(Ibagué)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7~8세쯤 되었을 때 칼리(Cali)로 이주했고, 이후 콜롬비아를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작가가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도시라고 느끼는 곳은 청소년기의 첫사랑을 경험한 도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 정의를 따른다면, 콜롬비아에서 저의 도시는 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경험들을 쌓았습니다.

 

 

칼리에서의 성장 과정은 어땠나요?

제가 기억하는 칼리는 동네의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축구를 하고, 모퉁이에서 야구를 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동네에서 함께 어울려 놀았던 순간들이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공부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형제 여섯과 자매 한 명이 있는 대가족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우리가 학업을 계속하려면 반드시 우수한 성적을 받아 장학금을 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고,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제 청소년 시절은 학구열이 강한 시기였고, 동시에 열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 집에 모여 함께 공부했고, 지적인 대화가 끊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 시기에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나요?

저는 다행히도 수학, 물리, 화학과 같은 이른바 ‘이과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3년~74년 무렵, 콜롬비아에서도 거대한 학생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68혁명(1968년 5월 혁명)과 비슷한 흐름이었습니다. 제 형제들도 이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책을 팔았고, 덕분에 저도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칼리의 시립 공과학교(Instituto Politécnico Municipal)에 다니면서 학생회에 참여했고, 정치적인 임명 관행과 형편없는 학문적 수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5/5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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