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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을 계기로 4월 19일 운동(M-19)에 합류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 게릴라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나요?
저는 1975년 6월, 16세의 나이에 M-19에 합류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였죠. 제가 이 운동에 끌린 이유 중 하나는 콜롬비아 카우카(Cauca) 지역과 포파얀(Popayán)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처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제 아버지가 농촌 출신이었고, 그가 자신의 땅에서 쫓겨났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저는 당시 과음비아노스(Guambianos)라고 불리던 원주민 소수 집단이 처한 상황에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기업들이 푸라세 화산(Volcán de Puracé)에서 유황을 채굴하기 위해 이 지역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물을 채굴한 후 땅을 황폐화하고, 토양을 산성화시켜 원래의 생태계를 파괴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의에 맞서 싸웠고, 그것이 제가 M-19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M-19에서의 활동 때문에 결국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된 건가요?
1978년, 당시 콜롬비아 대통령이던 훌리오 세사르 투르바이(Julio César Turbay)는 '안보 법령(Estatuto de Seguridad; 준계엄령 수준의 통제권 부여)'을 발효했습니다. 이 법령으로 인해 사실상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군부는 강력한 탄압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에 대한 저항 표시로 1978년 연말부터 1979년 초에 걸쳐 M-19는 보고타의 칸톤 노르테(Cantón Norte) 앞에 있는 몇 채의 집을 임대해 지하 터널을 팠고, 연말 축제가 한창이던 시기에 군사 무기 보관소에서 12,000정의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1979년 1월 6일, M-19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매우 강경했습니다. 군은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벌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저 역시 조직의 일원으로 신원이 확인되었고, 제가 잘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체포되기 전에 도망쳐 1979년 6월, 프랑스로 떠나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첫 며칠은 어떻게 보냈나요?
저는 한창 여름이던 시기에 프랑스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던 상태였고 파리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람은 콜롬비아에서 고문을 당했던 한 동료였는데 그의 형이 파리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저는 그곳에 머물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에서 온 난민들이 많았고, 대규모 남미 망명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 정부는 우파 정권이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정치적 난민들을 매우 환대했습니다. 우리는 무료로 프랑스어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숙소와 일정 금액의 생활 지원금도 제공받았습니다. 또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절차를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의 첫날들은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 속에서도 예상보다 체계적이고 따뜻한 지원을 받으며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을 받으셨습니다. 이 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그건 프랑스에서 공공의 선을 위해 기여한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입니다. 저는 이 상을 받으며,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프랑스어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며, 주머니에는 단 100달러뿐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이 새로운 사회에 성공적으로 통합될 수 있으며, 그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제 삶이 증명한 셈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저를 관대하게 받아주었고 저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치 과거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앞에서 맹세했던 것처럼, 저는 프랑스에 최고의 기여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M-19에서 활동하던 시절, 현 콜롬비아 대통령인 구스타보 페트로(Gustavo Petro)를 만난 적이 있나요? 두 분은 친한 사이인가요?
저는 구스타보 페트로의 친한 친구에 들진 않습니다. 2022년 10월, 저는 고향인 툰하에서 열린 콜롬비아 수도 도시 협회(Asocapitales) 행사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날 그는 행사 개회 연설을 해야 했는데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연설을 시작했고, 그다음 그가 도착해서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설 중 저를 동지 모레노(compañero Moreno)라고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16세에 M-19에서 활동했지만 당시에는 서로 알지 못했습니다. 툰하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지만, 그 이후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서로 아는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끝)
Interviewr Andrea Yepes Cuartas
기사 전문 보기 : 'La solución al cambio climático no es tecnología, es cambiar nuestro modo de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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